1402.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은 추석 명절이다. 차례를 지내고, 성묘까지 일찍 다녀왔다. 추석은 순 우리 말로 '한가위'라고도 한다. 여기 '가위'는 '가운데'를 의미한다. 음력 8월의 한 가운데, 혹은 가을의 한가운데인 8월 15일을 나타낸다. '한'은 '크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한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 혹은 가을의 한 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다. 추석(秋夕)은 말 그대로 하면 '가을의 저녁'이다. 추석을 중추절(仲秋節), 가배일(嘉俳日)이라고도 한다.
추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조상 대대로 지켜 온 우리의 큰 명절로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이웃들과 서로 나눠 먹으며 즐겁게 하루를 지내는 날이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떡을 빚어 나눠 먹었다고 해서 속담 중에 "일년 열 두 달 삼백육시오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다.
한가위날, 즉 음력 8월 15일에 뜨는 달이 가장 크고 밝다고 한다. 태양과 달리 달은 오래 전부터 특별한 존재였다. 태양은 항상 둥근 형태를 유지하지만, 달은 한 번 둥근 형태를 보여주고 전기나 촛불이 없었던 고대에는 둥근 달이 유일하게 빛이 되어 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일년 중 가장 밝고 큰 음력 8월 15일은 고대부터 함께 즐기는 축제가 되어 자연스럽게 명절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한가위 명절에 달이 보름달인 이유는 더 이상 자신만만하지 말고, 자신의 주장을 살펴보고 소멸시키라는 시기이다. 보름달은 자신이 이제 초승달을 향해 자신을 변신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 보름달의 충만한 원을 유지하려 하는 오만함에서 빠져나오라는 것이다. 여기서 오만은 세상의 심판자인 시간을 거슬리겠다는 몸부림이며, 시간을 멈춰 영생하겠다는 망상이기 때문이다.
한가위의 보름달은, 우리 인간에게 이제 덜어 낼 준비를 시키는 때이다. 덜어내는 행위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덜어내야 다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가 창조되기 위해서는 걷어 내야 한다. 덜어내는 행위 없이, 새롭고 참신한 시작은 없다. <창세기> 1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맨 처음에, 신이 우주를 창조하기 시작했을 때"라는 종속절로 시작한다. 여기서 '창조하다'라는 단어는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잘 못 번역한 것이다. 창조하다는 전에 없는 것을 새로 만든다는 의미가 되었지만, 히브리어로 '바라'라는 말은 '덜고 덜어 더 이상 빼낼 수 없는 상태로 만들다'란 의미라 한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창조는 자신의 삶에서 쓸데 없는 것,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지혜에서 출발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과거에 의존하는 부실한 것을 걷어내거나 과감하게 제거해야 한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의 의미는 "처음에, 신이 혼돈으로 가득한 하늘과 땅에서 쓸데없는 것을 걷어 내기 시작했을 때"란 의미이다.
우주의 원리는 균형(均衡)이다. 올라간 것은 내려오고, 내려간 것은 퉁겨져 올라오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아레떼(德)는 인간이 추구해야만 할 것이다. 그건 극단을 피하고 그 중심을 잡는 일이라고 했다. 용기는 만용과 성급함의 중간 어디이며, 절제는 낭비와 인색의 가운데이다. 그 가운데를 찾으려는 마음이 중용(中庸)이다. 중용의 존재를 배운 적도 없고, 중용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극단의 유혹에 빠진다. 왜 유혹에 빠지냐 하면, 자신의 보 잘 것 없는 정체성이 보상받기 위해서는, 자화자찬이 특징인 극단적인 무리에 속해, 자신의 쓸모를 끊임 없이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좌도 없고 우도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우가 상대방에겐 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좌와 우 같은 명칭을 가지고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 행위는, 열등감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속임수일 뿐이다.
코로나-19의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자는 의미에서 매년 추석 저녁에 친구들과 모이는 계모임은 취소했다. 나는 인문운동가로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e)'라는 말 대신에 '물리적 거리 두기(physical distance)'라는 단어 사용하기를 제언한다. 언어는 무의식적 습관을 드러내고, 언어는 생각을 지배한다. 물리적 거리는 냉정하게 지키되, 사회적 거리는 따뜻하게 좁혀 약자를 보호하고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은 10월이 시작 되는 날이다. '10월'은 '십월'이 아니라, '시월'이어서 좋다. 그래서 가을의 여유와 넉넉함이 더 느껴진다. 또 그런 달이 또 있다. '6월'을 '유월'이라 한다. 그리고 시월은 맺음의 시간인 동시에 버림의 시간이다. 버림은 상실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향한 희망이다. 그래 난 시월이 좋다. 아침 사진은 성묘 다녀오던 길에 찍은 것이다. 오늘 공유하는 시는 박두규 시인의 <고향>이다.
고 향/박두규
이십일 세기에 들어 고향은 스스로 나를 떠났다.
나숭개나 씀바구 그 흐드러진 봄나물은 그대로 두고
제 살아온 세월만 데리고 떠났다.
더 이상 영혼이 짓밟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겠지.
그렇게 고향은 가고
나는 홀로 남아 스스로 고향이 되었다.
마흔여섯 살 먹은 어린 고향이 되어
나는 나대로 갈 곳이 없었다.
바람찬 날의 팽나무 이파리로 흩어질 수도
봇도랑 참붕어로 누군가에게 잡혀 올려질 수도
동산에 올라 친구를 부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빈 껍데기의 고향이라도
그리움의 퇴적층이라도 되어 남아 있는 한
고향은 돌아올 것을 믿는다.
가뭇없이 사라진 마음을 헤집고
참을 수 없이 쏟아지는 눈발이 되어
차곡차곡 지난 세월을 돌려놓을 것이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내 고향도 세종시로 편입되는 바람에 옛 모습이 없다. 고향이 떠났다. 시인처럼, 나도,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서 다시 돌아오듯, 고향도 자기를 떠났지만 언젠가는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고향이 사실 어디 가겠는가? 그만큼 많이 변했다는 뜻이다. 맑고 아름다운 산천의 고향이 온갖 개발과 환경오염으로 ‘빈껍데기'만 남았다고 탄식한다. 그렇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 속에 고향이 존재하는 한 언젠가는 고향이 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눈발이 되어, 천재지변의 힘으로 고향이 돌아와 현실을 하나하나 부수고 제 모습을 찾을 것이라는 꿈을 꾼다. 아픈 희망이다.
번잡한 일상사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는 일은 우리들의 삶에 커다란 위안이 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돈과 관계된 것에만 눈을 파느라고, 경제 생각만 하느라고 삶의 가장 내밀한 영역인 아름다움을 등지고 산다.
어제 나는 가을의 아름다음을 만나러 고향에 갔다. 아름다움 이야말로 삶의 기쁨이고 행복에 이르는 길목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소유할 수 없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다. 내 소유물이 아니라도 보는 눈과 투명한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면 어디서나 우라는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투명한 감수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순수한 사랑이다. 따뜻한 사랑의 눈으로 보면, 보이는 것마다 모두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아름다운 사물을 보고 인식하고 경험하려면,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 존재가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모든 분별을 떠나서, 욕심을 떠나서 하나가 될 때 아름다움의 극치를 경험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아름답게 하는 것이고, 더러움은 더럽게 하는 것이다. 아름다움 별거 아니다. 함부로 하고, 제멋대로 하는 건 아름다움의 정반대이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천천히 어렵게 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이 윤리와 떨어질 수 없는 건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욕 한 번하고,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한번 꿀꺽 삼키고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입술을 깨물고 참는 데서 나온다. 손님이 나가자 마자 문을 꽝 닫아버리거나, 친구 차에서 내리자 마자 문 닫고 가버리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 그건 예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떠나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는 그 짧은 순간은 아름다운 인간의 시간이다. 아름답게 살려면 아름다움을 믿어야 한다.우리 주변은 그냥 일하고, 여유가 있으면, 남 생각 좀 해 주는 게 전부다.
지난 주부터 김탁환 소설가 쓴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란 책을 읽고 있다. 제목이 좋아서 구입했는데, 생각보단 실망스럽다. 소설가는, 소멸되어 가는 마을을 찾다가, 곡성(谷城)을 만났다. 게다가 거기서 농업회사법인 미실란 대표 이동현을 만났다. 그는 미생물학을 전공한 박사이자 환경을 먼저 생각하는 농부이자 농업의 미래를 걱정하는 기업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디지털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박두규 #복합와인문화공간_뱅샾62
글과 사진 인문운동가 박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