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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득

노벨 문학상 루이스 글릭

<아침의 시 - 2020년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

류시화시인의 글입니다

미의회 계관시인을 역임한 미국 시인 루이스 글릭(1943~ )이 202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번에 출간된 『마음챙김의 시』(수오서재)에 실린 <눈풀꽃>의 시인이다. 시적 기교와 감수성이 뛰어나며, 고독과 고통 속에서도 소생하려는 생명의 의지를 표현해 온 글릭의 시에 대해 스웨덴 한림원은 ‘개인 존재를 시적 목소리로 승화했다.’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지난봄 내가 페이스북에 처음 소개했을 때도 시 <눈풀꽃>은 많은 이들에게 여러 색의 감정을 안겨주었다. 당시 나는 ‘이 시를 인생이라는 계절성 장애를 겪으며 잠시 어두운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읽어 주고 싶다.’고 썼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시 읽어 주기’ 이벤트에서도 이 시를 신청한 사람이 여럿이었다.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 루이스 글릭 <눈풀꽃> (류시화 옮김)

눈풀꽃은 이른 봄 땅속 구근에서 피는 작은 수선화처럼 생긴 흰 꽃이다. 설강화(雪降花, snowdrop)라고도 한다. 눈 내린 땅에서도 묵묵히 꽃을 피우는 특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미국으로 이민 온 헝가리 유대인의 후손인 글릭은 십 대에 거식증을 심하게 앓아 7년 동안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정서적 혼란으로 학교도 정상적으로 다니지 못했다. 두 번의 결혼 생활도 얼마 가지 못했다.

시인에게 시는 ‘삶을 잃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노력’ 중 하나이다. 49세에 글릭은 일시적이지만 열정적 존재인 꽃을 이야기한 시집 『야생 붓꽃The Wild Iris』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해 미국 현대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고, 고립되고,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컸다.

2년 전 출간한『시로 납치하다』(더숲출판사)에도 나는 글릭의 시 <애도>를 소개했다. 50대 초반,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오고 나서 그 시를 썼다.

당신이 갑자기 죽은 후,
그동안 전혀 의견 일치가 되지 않던 친구들이
당신의 사람됨에 대해 동의한다.
실내에 모인 가수들이 예행연습을 하듯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당신은 공정하고 친절했으며 운 좋은 삶을 살았다고.
박자나 화음은 맞지 않지만 그들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진실하다.

다행히 당신은 죽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조문객들이 눈물을 닦으며 줄지어 나가기 시작하면,
왜냐하면 그런 날에는
전통 의식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
9월의 늦은 오후인데도
햇빛이 놀랍도록 눈부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그때
당신은 갑자기
고통스러울 만큼 격렬한 질투를 느낄 것이다.

살아 있는 당신의 친구들은 서로 포옹하며
길에 서서 잠시 얘기를 주고받는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저녁 산들바람이
여인들의 스카프를 헝클어뜨린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운 좋은 삶’의 의미이므로.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므로.

- 루이스 글릭 <애도> (류시화 옮김)

애도는 죽은 자에 대한 감정이다. 그런데 만약 살아 있는 당신이 애도를 받는다면? 당신이 살아 있어도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면? 죽은 다음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아도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는 것만큼 ‘운 좋은’ 일은 없다. 그 운 좋은 순간들을 놓치고 있다면 실로 애도 받을 일이다.

시의 목적은 ‘이 삶이 충분히 경험해 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나는 믿는다. 상처받기 쉬운 육체와 정신을 소유하고 고난과 시련으로 얼룩진 시간들을 살았지만, 글릭은 그 목적에 충실한 시들을 써 왔다. 그녀의 시는 인간의 여정에서 상실과 화해하고 삶을 포용하려는 의지를 고백 투의 운율에 실어 노래한다. 아직까지 국내에 번역된 시집이 없고 시가 소개된 경우도 거의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루이스 글릭의 시가 이 기회에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질 수 있을 것 같아 기쁘다.

노벨 문학상 수상 발표 후 기자의 전화에 글릭은 “놀랍고 기쁘다.”고 말하면서 ‘이제 나는 어떤 친구도 갖지 못하겠구나. 내 친구들 대부분은 작가이니까.’라고 처음 생각했다고 웃었다. 그 직전에 한 말은, “일단 아침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1년 전, 내가 '아침의 시'에 번역 소개한 글릭의 또 다른 시 <개양귀비>가 있다.

위대한 것은
생각이 아니다.
느낌이다.
그렇다, 나는
느낌을 가지고 있고,
그 느낌을 따른다.
나에게는 태양이라 불리는
하늘의 신이 있다.
그 신에게 나를 열어
내 가슴의 불을 보여 준다.
내 안의 신이 피어나는 것 같은
불을.
가슴이 아니면
이런 아름다움이 어떻게 가능한가.
당신도 한때는
나 같았는가, 오래전
인간이 되기 전에는?
한때는 자신을 활짝 열었는가?
그런 후 다시는
열지 않게 되었는가?
사실 나는 지금
당신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어서
말하는 것이니,
바닥에 꽃잎마다 붉게
흩어지고 있으니.

- 루이스 글릭 <개양귀비>

물감양귀비라고도 불리는 붉은색 개양귀비(red poppy)는 꽃잎이 얇아 작은 바람에도 펄럭인다. 꽃이 피기 전에는 꽃망울이 밑을 향해 있다가 필 때는 홀연히 위를 향한다.

꽃잎을 다 꺼내면 해를 향해 자신을 한껏 연다. 속안에 어떤 감춤이나 그늘도 남겨 두지 않는다. 꽃잎마다 질 줄 알면서도,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을 활짝 열어 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꽃의 본성은 피어나는 것이고, 자신을 여는 것이다. 하늘의 태양을, 자신 안의 불꽃을 경험하는 것이다. 당신 역시 닫고, 움츠러들고, 주저하는 것이 목표는 아니지 않은가?

글릭은 개양귀비의 입을 빌어 말한다. 삶에서 위대한 것은 생각과 머리가 아니라고. 중요한 것은 가슴의 느낌, 직관, 혹은 본능이라고. 그러면서 또 묻는다. 왜 삶을 유보하느냐고. 혹시 전에 자신을 열었다가 크게 상처받은 적이 있느냐고. 그래서 더 이상 느낌을 따르지 않게 되었느냐고.

꽃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은, 과거의 상처로 인한 망설임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리도 아름다운 색을 지니게 되는 걸까? 우리 또한 주저함 없이 온 존재를 열면 저렇게 아름다운 색일까? 정말로, 가슴이 아니면 어떻게 그런 아름다움이 가능하겠는가?

마음을 굳게 닫아걸지만 않는다면, 가슴은 외부의 태양과 내면의 불꽃을 일치시키기 위해 부단히 움직여 나간다. 때로는 자기모순적이 된다 해도 놀랄 필요가 없다. 가슴이 이곳까지 당신을 데려왔고, 앞으로도 인도할 것이니. 당신은 개양귀비꽃의 형제자매라고 올해의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이 말하지 않는가.

(이 글은 오늘자 동아일보 ‘책의 향기’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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