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 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그리워 하는가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했기에
이토록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나
꽃은 시들고 해마저 지는데
저문 바닷가에 홀로 어두움 밝히는 그대
그대와 나 그대와 나
해뜨기 전에 새벽을 열지니
해뜨기 전에 새벽을 열지니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밤마다 별빛으로 빛나는가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흔들어 새벽을 깨우는가
- 안치환님이 부른 노래도 있습니다.
♥그대를 만나기 전에 나는 / 안도현
그대를 만나기 전에
나는 빈 들판을 떠돌다 밤이면 눕는
바람이었는지도 몰라
그대를 만나기 전에
나는 긴 날을 혼자 서서 울던
풀잎이었는지도 몰라
그대를 만나기 전에
나는 집도 절도 없이 가난한
어둠이었는지도 몰라
그대를 만나기 전에
나는 바람도 풀잎도 어둠도
그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도 몰라
♥아내 / 손경찬
당신은 내게 늘 한결같은 햇살입니다.
지금 먹구름이 우리 사이를 가르고 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당신의 따사로움에 구름도 바람도 항복하겠지요.
당신은 내게 한결같은 고향 바다입니다.
끝없이 푸른 물결로
부서지는 파도로
밀물과 썰물로
하루도 빠짐없이 내 맘 씻겨 내립니다.
당신은 내게 든든한 방파제
거센 풍랑으로 다가오는 고난에서 나를 지켜 주고
흔들림 없이 밝은 빛으로 인도하는 등대입니다.
당신은 이 땅에 내려온 나의 별입니다.
나의 태양입니다.
당신의 밝음이 나를 길 잃지 않게 합니다.
♥아내 / 윤수천
아내는 거울 앞에 앉을 때마다
억울하다며 나를 돌아다본다
아무개 집안에 시집 와서
늘은 거라고는 밭고랑 같은 주름살과
하얀 머리카락뿐이라고 한다
아내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모두가 올바르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내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슬그머니 돌아앉아 신문을 뒤적인다
내 등에는
아내의 눈딱지가 껌처럼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잠시 후면
아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발딱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환하도록 문지르고 닦아
윤을 반짝반짝 내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등꽃 아래서 / 김현희
- 부부의 날에 붙인 합창곡
그대를 만나던 그 푸른 그 시절에
별처럼 반짝이며 가슴 설레었지요
밝은 달 바라보며 언약하던 그날 밤
빨간 사과 내밀며 아픈 맘 달랬지요
세상에 찬 바람 일고 눈보라 몰아쳐도
소중한 내 자식 위해 살아온 지난 날
보듬어 주고 받쳐준 그 세월이
저 숲에서 일렁이는 새 잎처럼 많구려
따스한 손 잡으면 저절로 힘이 솟고
마주보고 있노라면 기쁨 꽃 피었지요
꿈 하나 노래하며 살아온 세월 속에
별처럼 반짝이는 지난 날의 추억 지난 날의 추억
♥부부 /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부부에 대하여 / 류지남
누가 누군가에게 물이 들었다는 말은
몸에서 몸으로 물이 건너갔다는 뜻이다
피야, 부모에게서 저절로 흐른다지만
물은, 쉬이 사람을 건너지 못하거니
한 우물에서 나온 물 오래 나눠 먹고
뿌리와 뿌리 맞대고 삶 부비다 보면
어느덧 서로의 살 속으로 물이 스며
저녁노을처럼 함께 붉어져 가느니
오랫동안 더불어 밥물 맞추는 동안
서로의 목숨처럼 가까워진 사람이여
마침내,
손때 묻은 거울처럼 물든 사람이여
♥부부 / 문정희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 꽃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 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부란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또 그렇게 봄날은 간다 / 이재무
아내한테 꾸중 듣고
집 나와 하릴없이 공원 배회하다가
벤치에 앉아 울리지 않는 핸드폰 폴더
괜스레 열었다 닫고
울타리 따라 환하게 핀 꽃들 바라보다가
꽃 속에서 작년 재작년 죽은 이들
웃음소리 불쑥 들려와 깜짝 놀랐다가
흘러간 옛 노래 입 속으로만
흥얼, 흥얼거리다가 떠나간 애인들
어디서 무얼 지지고 볶으며 사나
추억의 페이지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스레 핸드폰 자지러진다
“아니, 싸게 들어와 밥 안 먹고 뭐해요?”
아내의 울화 어지간히 풀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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