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득/시 이야기 썸네일형 리스트형 살구꽃 장석남 여락과 읽는 시 살구꽃 장석남 마당에 살구꽃이 피었다 밤에도 흰 돛배처럼 떠 있다 흰빛에 분홍 얼룩 혹은 제 얼굴로 넘쳐버린 눈빛 더는 알 수 없는 빛도 스며서는 손 닿지 않는 데가 걸리듯 담장 바깥까지도 환하다 지난 겨울엔 빈 가지 사이사이로 하늘이 뜯어진 채 쏟아졌었다 그 하늘을 어쩌지 못하고 지금 이 꽃들을 피워서 제 몸뚱이에게 꿰매는가? 꽃은 드문드문 굵은 가지 사이에도 돋았다 아무래도 이 꽃들은 지난 겨울 어떤, 하늘만 여러 번씩 쳐다보던 살림살이의 사연만 같고 또 그 하늘 아래서는 제일로 낮은 목소리, 발소리 같은 것 들려서 내려온 神(신)과 神(신)의 얼굴만 같고 어스름녘 말없이 다니러 오는 누이만 같고 더보기 겨울 들녘에 서서 오세영 여락과 읽는 시 겨울 들녘에 서서 / 오세영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빈 공간의 충만. 아낌없이 주는 자의 기쁨이 거기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떨어진 낟알 몇 개.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지상의 만남을 하늘에서 영원케 하는 자의 안식이 거기 있다. 먼 별을 우러르는 둠벙의 눈빛. 그리움으로 아픈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너를 지킨다는 것은 곧 나를 지킨다는 것, 홀로 있음으로 오히려 더불어 있게 된 자의 성찰이 거기 있다. 빈 들을 쓸쓸히 지키는 논둑의 저 허수아비. 더보기 삶을 사랑하는 사람 정용철 여락과 읽는 시 삶을 사랑하는 사람 / 정용철 봄이 오는 바닷가에 서면 살갗이라는 단어와 미소라는 단어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모래밭은 살갗을 드러내고 바다는 넓고 잔잔한 미소를 짓고 은빛 여울을 쓰고 달려오면서 파도는 끝없는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봄이 오는 산 속에 서면 인내라는 단어와 진실이라는 단어와 고독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산은 그동안 참고 있던 긴 호홉을 서서히 내뱉고 나무들은 진실을 말하느라 잎을 돋우며 바위는 침묵으로 고독의 무게를 전합니다. 봄이 오는 들녘에 서면 희망이라는 단어와 믿음이라는 단어와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봄비로 촉촉해진 논은 희망으로 부풀고 부지런한 농부의 손길은 믿음을 심고 가을의 결실은 기다림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 더보기 나무의 사랑법 김선태 여락과 읽는 시 나무의 사랑법 / 김선태 나무를 보면 날지 못한 것들이 생각난다 날고는 싶은데 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한다 햇빛 쏟아지는 하늘로 날아가고 싶어서 사방팔방으로 열망의 가지를 뻗고 그 가지마다 무수한 날개를 달고 파닥이지만 어쩔 수 없이 뿌리는 땅 속을 향하는 것들 어쩔 수 없이 뿌리를 땅 속에 묻어야 하는 것들 그래서 하늘과 땅 사이엔 나무가 있다 나무를 보면 날지 못한 것들이 생각난다 날고는 싶은데 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한다 햇빛 쏟아지는 하늘로 날아가고 까마득한 그리움의 거리가 있다 직립한 채 하늘 향해 두 손 모으는 간절할수록 이파리가 무성한 기도가 있다 그리하여 찬바람 부는 늦가을이면 제 메마른 이파리들을 아낌없이 털어 하늘로 날려 보내는 나무의 사랑법이여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그.. 더보기 물의 연가 김연수 여락과 읽는 시 물의 연가 / 김연수 그대 위해서라면 아무리 낮은 곳이라도 내려설 수 있어요 천만 번도 더 그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어요 심산계곡 거친 들 대양 너머 하늘까지라도 그대에게 기쁨 된다면 꽃과 별의 속삭임을 뜨거운 가슴에 품어 노래를 빚어내듯 살과 넋을 가르는 아픔도 함묵으로 일렁일 수 있어요 그대와 하나일 수 있다면 천지에 내 모습 자취 없이 사라진대도 꽃잎으로 웃을 거예요 푸른 휘파람 날리며 행복의 열매를 익힐 거예요. 더보기 골목 피아노의 집 이준관 여락과 읽는 시 골목 피아노집의 봄 / 이준관 골목 피아노 집에 악보를 들고 소녀들은 피아노를 배우러 온다 해는 피아노집 지붕 위에 높은음자리표로 걸려 있다 피아노 소리를 쪼아 먹고 솜병아리처럼 노오란 부리를 재재거리며 피어나는 꽃들 햇빛과 봄비가 섞인 흙으로 키운 화분의 꽃을 팔러 꽃장수는 피아노집을 찾아온다 빨래줄에 앉아 첫 비행을 예감하며 눈부시게 날개를 떠는 새끼 제비들 골목에 핀 냉이꽃도 피아노집 빨래줄의 빨래도 오늘은 하이얀 건반이다 피아노 집 담장아래 핀 조그만 풍차 같은 민들레꽃 내 마음속에서도 노오란 풍차가 돈다 나는 삶이라는 악보를 옆구리에 끼고 골목 피아노집에 봄을 배우러 가고 싶다 더보기 카타령 임보 여락과 읽는 시 키 타령 / 임보 앉은키만 보고 나를 골랐다는 아내는 평생 키 타령이다. 키 큰 놈 골라라 키 큰 놈 골라라 두 딸년들 붙들고 야단이다 그랬건만 큰 딸년이 고른 사위 녀석도 애비 닮은 실패작이다 둘째 딸년 붙들고 키 큰 놈 잡아라 키 큰 놈 잡아라 그런데 둘째 년은 아직 키다운 키를 못 만났는지 40이 넘도록 고르고만 있다 세상에 키 작다고 못 할 것이 뭣인가 싶다가도 TV 광고판에 등장한 늘씬한 미남들 보면 기가 죽는다 하지만 아내여, 만일 내가 저렇게 잘 빠진 사내였다면 어찌 당신 차례까지 왔겠어? 더보기 생의 노래 이기철 여락과 읽는 시 생의 노래 / 이기철 움 돋는 나무들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흙 속에서 초록이 돋아나는 걸 보면 경건해진다 삭은 처마 아래 내일 시집갈 처녀가 신부의 꿈을 꾸고 녹슨 대문 안에 햇빛처럼 밝은 아이가 잠에서 깨어난다 사람의 이름과 함께 생애를 살고 풀잎의 이름으로 시를 쓴다 세상의 것 다 녹슬었다고 핍박하는 것 아직 이르다 어느 산기슭에 샘물이 솟고 들판 가운데 풀꽃이 씨를 익힌다. 절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지레 절망을 노래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꽃잎 하나씩은 지니고 산다 근심이 비단이 되는 하루 상처가 보석이 되는 한 해를 노래할 수 있다면 햇살의 은실 풀어 내 아는 사람에게 금박 입혀 보내고 싶다 내 열 줄 시가 아니면 무슨 말로 손수건만한 생애가 소중함을 노래하리 초록에서 숨 쉬고 순.. 더보기 봄 우체부 이준관 여락과 읽는 시 봄 우체부 / 이준관 나무에도 꽃밭에도 빨간 우체함이 있어 봄 우체부는 자전거 페달을 밟고 온다 진달래꽃도 목련꽃도 우체부 자전거 페달이다 차르르 차르르 감고 도는 길의 체인 햇빛이 기름을 칠해준다 종달새는 우체부 모자에 둥지를 틀고 새끼 종달새를 친다 우체부보다 먼저 집집마다 나무마다 새들이 벨을 누른다 우체부는 나무에도 강아지 꼬리에도 토끼 귀에도 편지를 주렁주렁 매달아준다 더보기 박주용 시인의 시집 '점자, 그녀가 환하다' 박주용 시인의 시집 '점자 그녀가 환하다' 를 받았어요. 박주용 시인님의 책을 받고 싶어서 제 입으로 달라고 했어요. 18년 문단 활동을 하면서 처음입니다. 민망하지만 잘했다고 생각해요. ㅎㅎ 박주용 시인은 충복 옥천 출생으로 201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이 되신 분입니다. 시인님의 건강과 문운을 빕니다. 잘 읽겠습니다^^. 콜라주 박주용 새들의 부리도 멈춘 자리 미친듯이 온몸 찍어 붙이는 저 담쟁이의 표현 중독 시멘트 벽도 희망이다 더보기 햇빛이 말을 걸다 권대웅 여락과 읽는 시 햇빛이 말을 걸다 / 권대웅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더보기 8월에 꿈꾸는 사랑 이채 여락과 읽는 시 8월에 꿈꾸는 사랑/이채 여름 하늘은 알 수 없어라 지나는 소나기를 피할 길 없어 거리의 비가 되었을 때 그 하나의 우산이 간절할 때가 있지 여름 해는 길기도 길어라 종일 걸어도 저녁이 멀기만 할 때 그 하나의 그늘이 그리울 때가 있지 날은 덥고 이 하루가 버거울 때 이미 강을 건너 산처럼 사는 사람이 부러울 때도 있지 그렇다 해도 울지 않는다 결코 눈물 흘리지 않는다 오늘은 고달파도 웃을 수 있는 건 내일의 열매를 기억하기 때문이지 더보기 그늘 만들기 홍수희 여락과 읽는 시 그늘 만들기 (홍수희) 8월의 땡볕 아래에 서면 내가 가진 그늘이 너무 작았네 손바닥 하나로 하늘 가리고 애써 이글대는 태양을 보면 홀로 선 내 그림자 너무 작았네 벗이여, 이리 오세요 홀로 선 채 이 세상 슬픔이 지워지나요 나뭇잎과 나뭇잎이 손잡고 한여름 감미로운 그늘을 만들어 가듯 우리도 손깍지를 끼워봅시다 네 근심이 나의 근심이 되고 네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 벗이여, 우리도 서로의 그늘 아래 쉬어 갑시다 더보기 여름 최영철 여락과 읽는 시 여름/최영철 쌈 싸먹고 싶다 푸른색을 어쩌지 못해 발치에 흘리고 있는 잎사귀 뜯어 구름 모서리에 툭툭 털고 밥 한 숟갈 촘촘한 햇살에 비벼 씀바귀 얹고 땀방울 맺힌 나무 아래 아, 맛있다 더보기 꽃 김춘수 여락과 읽는 시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더보기 이전 1 ··· 12 13 14 15 16 17 18 ··· 23 다음